이세계는 평화 78화
용자 소환에 말려들었는데, 이세계는 평화로웠습니다
78화 : 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거겠지?
리그포레시아에 온 지 2일째 밤, 내일은 내가 참가하는 수확제가 있어 오늘은 차분히 쉬려고 했.....는데, 낮에 잔 건 아니고 기절한 덕분에 잠이 안 온다.
조금 밤바람이라도 쐬려고 한 그 타이밍에, 누가 좀 살살 문을 노크했다.
"네"
반사적으로 대답했는데, 답이 없다.
원래라면 이상하게 생각해야겠지만, 나에게는 감응 마법이 있어서 누가 왔는지를 알고 있다.
"왜 그러세요? 지크씨"
"....."
그렇다. 노크를 하고 답이 없는 건 지크씨라서 그렇다.
슬슬 날이 바뀔 시간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지크씨는 작게 손을 움직였다.
"산책이요? 네, 마침 저도 잠이 안 와서요"
"...."
아무래도 지크씨도 잠이 안 왔는지 내가 일어나 있다면 산책이라고 가지 않겠냐고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밤바람을 쐬려고 한 타이밍이어서,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지크씨를 따라가기로 했다.
달빛이 비추는 리그포레시아 마을을 지크씨와 걷는다.
우리 앞에는 빛나는 구체 마법구....휴대용 조명 마법구라는 도구가 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우리 세계에서 쓰는 랜턴 같은 건데, 손에 들지 않아도 되서 편하고, 어떻게 비출지도 조정할 수 있어 이게 더 성능이 좋다.
잠시 걸어갔더니 광장 같은 곳에 도착해,지크씨에게 추천을 받아 거기 있는 벤치에 앉았다.
지크씨도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조명 마법구에 비쳐 루비처럼 붉은 머리가 살짝 빛나고, 그 예쁜 옆모습에 무심코 두근거렸다.
리그포레시아의 밤은 매우 조용해, 가끔 부는 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지나간다.
조금 침묵이 흐른 후, 나는 문득 생각 나 지크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지크씨.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했네요. 도와주셔서 고마ㅇ――어?"
"...."
블랙 베어의 공격에서 지켜준 것에 대해 다시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말하는 도중 지크씨가 그걸 막듯 검지를 세와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몇번 젓고,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적었다.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제개 해야 돼요, 카이토씨,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어색했던 리리와의 관계를 옛날처럼 되돌릴 수 있었어요'
"아, 아니, 저는 별로 아무것도...."
어디까지나 나는 그 때 생각한 걸 말했을 뿐이고, 지크씨와 리리아씨 관계가 수복된 것은 지크씨가 진심으로 리리아씨를 생각해 혼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별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대답했는데, 지크시는 다시 고개를 젓고 메모지에 글자를 적었다.
'계기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계기를 준 거에요. 겸손은 미덕이지만, 지금은 받아 주세요'
"....네"
'....다만, 조금 주의를 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주의요?"
거기까지 쓴 후, 지크씨는 예쁜 파란 눈으로 나를 보며, 다음 말을 적은 메모를 보여줬다.
'이번은 상황상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
'당신이 다치면 저는 슬퍼요.... 자기 자신도 소중히 해 주세요'
"....네"
무모한 행동을 하는 동생에게 조언을 하듯 상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크씨에게, 나는 제대로 대답했다.
지크씨는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다시 메모지에 글자를 적었다.
'....카이토씨. 조금만.... 어깨를 빌려도 될까요?'
"어깨요? 아, 네. 괜찮은데요...."
'그럼, 실례합니다'
"네!? 지, 지크씨!?"
어깨를 빌린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별로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알았다고 했더니 지크씨는 나에게 머리를 기댔다.
지크씨의 키는 딱 나랑 비슷해서, 기대기에는 딱 적당한 높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마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엘프족 특유의 긴 귀가 살짝 흔들려, 기댄 머리에서 지크씨의 체온이 전해진다.
그대로 지크씨는 잠시 눈을 감고 나에게 몸을 기댔다.
당연히 지크씨 같은 미인이 이런 행동을 하면 나는 완전히 냉정해지지 못하고 아까부터 경종이 울리듯 심장이 맥박뛴다.
'카이토씨는, 언제나.... 저에게 말을 걸어줬죠'
"응?"
앉은 자세인 채로 석화된 것퍼럼 굳어 있었는데, 언제 썼는지 시선의 끝에 메모지가 나타났다.
'저는 그, 말을 못 하고, 키가 커서 압도감을 주는지 별로 누가 말을 거는 일이 없었어요'
"그, 그러고보니 저도 처음에는 지크시가 쿨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지크씨는 170cm정도로, 여자로서는 큰 편이며 매우 정돈된 얼굴과 차분한 분위기라서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쿨하고 금욕적인 분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자주 저에게 말을 걸어 줬어요. 대답도 못 하는 저를 지겨워하지도 않고..... 그게 매우 기뻤어요'
"그건, 그냥 제가 지크씨랑 대화를 하는 게 즐거워서 그래요. 분명 처음에는 쿨한 분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대화를 해 보면 지크씨는 매우 가정적이고 다정하고, 말하기 좋은 멋진 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내 말을 듣고, 지크씨는 조금 부끄러운 듯 미소지은 후 다시 눈을 감고 기대왔다.
다시 찾아온 침묵은, 결코 불편한 게 아니라 뭔가 따뜻하고 좋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잠시.... 가끔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온화하게 흐르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더니, 지크씨가 천천히 내 어깨에 얹었던 머리를 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너무 늦으면 내일 지장이 와요. 슬슬 돌아가죠'
"네"
지크씨 말에 따라 나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한 타이밍에, 지크씨가 스윽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어!?"
"...."
"지크씨?"
"...."
갑작스런 일에 놀랐는데, 지크씨가 대답 없이 걸어간다.
얇고 부드러운 손을 내 손에 겹치고, 나를 당기듯 조금 앞을 걸어가는 지크씨 볼은, 빛이 반사돼서 그런건지 모르겠는데 조금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여관 입구에서 지크씨와 헤어져 내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아까까지 있었던 일이 꿈인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침대에 누우려고 한 타이밍에 눈치 챘다.
어느샌가 내 옷 주머니에 작은 메모지가 들어가 있다. 이건 분명 지크씨가 쓴 거다. 메모지를 집어 방의 조명 마도구로 비춰 읽었다.
'올곧고 다정한 카이토씨가 정말 좋아요. 부디 앞으로도 그런 다정한 당신으로 있어 주세요. 곤란하게도 라이벌은 많을 것 같은데, 저도 힘낼 테니까.... 되도록이면 가끔 저도 봐 주세요'
"...."
뭔가 함축적인 메모를 보고 나는 방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의적으로 생각해주는 것 같은데, 라이벌은 무슨 의미지? 분명 지크씨네는 내일 수확제에 참가를 안 하니까 다른 참가자와 경쟁할 건 없을 텐데....
으~음. 잘 모르겠지만, 별로 싫은 기분은 안 든다.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니 나는 그 메모지를 매직 박스에 넣고 조명을 끈 후 침대에 누왔다.
아까까지는 잠이 안 왔는데, 지크씨 덕분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지크씨와 밤길을 산책하고 대화를 했어. 종종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이 있긴 했는데, 이건――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