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

현실주의자 3화

레이빈 2019. 2. 20. 12:55
반응형

꿈 꾸는 남자는 현실주의자


3화 :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무사히 학교 수업이 끝났다. 어째선지 오늘은 매우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아침과 점심 일을 빼면 딱히 뭐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 공부만 하는 하루는 이런 거겠지.

하지만 기분 탓일까, 반 분위기가 평소보다 조용한 것 같다. 어제까지는 좀 더 시끌벅적했던 것 같은데...


"조, 졸려..."


"뭐야, 수면부족이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옆에 있는 친구가 축 책상에 늘어져 한탄하길래 반응을 했더니 어색한 반응을 했다. 매우 자연스럽게 질문을 했는데 아무래도 답이 틀린 것 같다.

그런 친구와 반대쪽, 왼쪽에 앉아 있는 아이카를 봤더니, 아직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말을 걸어봤다.


"아이카, 갈래?"


"어? ...ㅇ, 왜 내가 너 같은 거랑!"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어..."


평소에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거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이상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해, 가방을 들고 교실에서 나왔다.

가는 길에 어디 들를까. 그러고보니 중학교때 읽던 만화가 있었다. 도중까지는 정기적으로 샀는데, 그거 아직 나오고 있으려나. 하교하기 전에 물 좀 빼고 가자... 오늘은 왠지 화장실이랑 인연이 있구나.


"──응?"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 오른쪽, 세면대 앞에 있는 큰 거울. 그걸 보고, 나는 오늘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위화감이라기보다 자각이라고 해야 되려나.


"...나, 뭐 하고 있었던 거지"


거울에 비친 건 매우 길어진 갈색 머리를 살짝 정리한 것밖에 없는 나. 자신이 비치는 건 당연한 거지만, 주목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새 삶을 살겠다고 정리한 헤어 스타일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얼굴. 별로 키도 크지 않다. 더욱이 능력면으로 말하자면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가 우수한 것도 아니다.

별볼일없는 놈... 이라고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너무나도 평범한 놈이다. 누군가랑 비교하면 상위호환인 녀석이 얼마든지 있다.


낮에 느꼈던 의문. 왜 아이카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는데 열이 식은 것 같은 감각에 빠졌는가, 그 정체는 딱 이걸 자각한 거 때문 아닐까?


나츠카와 아이카는 높은 절벽에 핀 꽃인 거다.


귀엽거나 스타일이 좋은 연예인에게 연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나에게 나츠카와 아이카란 이 시대를 풍미하는 인기 아이돌이며, 나는 그런 그녀에게 연심을 품는 팬이다.

눈 앞에 최애 아이돌이 TV 촬영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답은,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일정 거리를 두고 거기서 응원한다, 다. 이거야말로 팬의 귀감.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 든 건 그래서인 건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다. 아이카 같은 용모 단련하며 근면한 애가 나 같은 녀석과 어울릴 리가 없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몰랐던 걸까.


"사귀자니... 실화냐"


아무도 없는 남자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얼굴에 피가 쏠린다. 주위에서 보면 지금까지 나는 엄청 무모한 도전을 하는 피에로처럼 보였을 거다.

더욱이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가 한도 끝도 없이 쫓아오면 여자가 얼마나 기분 나쁜 체험을 했을까.


"어떻게... 이름으로 불렀던 거지..."


거울에 비친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그 반짝반짝 두둥실한 긴 시간은 나에게서 생각할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빼앗아갔다. 나는 남의 사정이라는 걸 무시하고 있었던 거다. 진짜냐 자중하자...


"..."


뻘뻘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바람을 쐬며, 우연히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닦았다. 신기하게도 그 땀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실사화라는 건 왜 그렇게도 깊은 죄를 짓는 걸까. 예전 중학교 때 수험 기간이라서 잘 안 보던 만화 시리즈가 있었는데, 설마 지금에 와서 그 실사판으로 그 때의 다음 얘기를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무엇보다, 계속 밀려오는 이건 아니라는 느낌. 이건 죄다.


이건 원작으로 기억을 덮어씌워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의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연히도 지금은 집에 나밖에 없어, 2층 방에서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상상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아이카...? 왜 우리 집에?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야?"


시각은 19:30. 그런 시간에 우리의 아이돌 나츠카와 아이카가 찾아왔다. 긴 흑발은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살짝 젖어 있고, 팔의 하얀 피부가 드러나는 섹시함에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애초에 이쪽은 항상 두근두근하고 있지만.


"느, 늦어서 미안하게 됐네..."


"그건 됐는데, 너 왜..."


"부, 부활동에 남아있던 애한테 너네 집 가르쳐달라고 했어!"


이런 미소녀 혼자 밤길을 걷다니 너무 위험하잖아. 사랑 때문에 격한 설교를 해버릴 것 같다. 아니 이 시점에서 내가 위험한 짓을 할 것 같다.

애초에 왜 우리 집 주소를 알아본 거지? 아이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간단히 상상이 간다. 적어도 아이카가 나에게 접근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사실은 호감도가 높다...?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아이카라면 이런 남자 어ㄸ너 수단을 써서든 떨쳐낼 거다.


"뭐, 뭐 할 말 있어?"


"그, 그래, 맞아"


"..."


...그렇구나.


드디어 왔구나 싶었다. 기분 나쁘니까 이제 달라붙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하든가, 아니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제 자기한테 관여하지 말라고 하든가. 아이카는 그걸 말하려고 굳이 찾아온 거다. 아니면 이런 수고스러운 짓을 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들어올래? 마침 아무도 없어"


"잠깐! 들여보내서 무슨 짓을 하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도 보충해 둘게"


들여보내서 무슨 짓을 할 때 가족들이 돌아오면 위험하잖아. 애초에 요즘 시대에 그런 짓을 할 생각도 배짱도 없다.


우물쭈물하며 들어온 아이카를 다이닝 테이블에 앉혔다. 거실 한 구석에 있는 게 그녀도 안심할 수 있을 거다.

아직 초여름도 안 된 계절. 그런 밤을 목욕 하고 나와서 걸으면 몸이 차가워질 거다. 추위보다 꾸미는 걸 우선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원피스는 아무래도 너무 얇은 거 아닐가? 왜 그런 어깨가 드러나는 선정적인 복장으로 온 거야? 응?


아이카 앞에 레토르트 양파 스프(어머니의 손맛)을 놓고, 의자에 걸린 담요를 내밀었다. 드물게도 그녀는 얌전히 따라 그걸 둘렀다. 아이돌의 몸 관리는 제일 중요하다.


"저기, 너 말이야... 무슨 일 있어?"


"있었다니... 나, 어디 이상했나?"


"이상해... 아니 안 이상했는데!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치, 침착해"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글로만 보면 진짜 뭔 소린지 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ㅓ. 역시 아이카는 내가 오늘 이상해졌다는 걸 알아챈 것 같다. 그게─잠깐만, 어? 안 이상했어? 그렇다면, 평소에는 머리가 이상한 주제에 오늘은 정상인처럼 행동했다는 건가? 뭐야 이 추진력을 얻어서 맞은 것 같은 느낌.

아니, 하지만 그 화장실에서 일어난 이상한 자각을 지금 여기서 말하라고? 엄청 부끄러워 어떻게 말해.


"ㄴ, 너 평소에는 쳐도 반응이 없다고 해야 되나, 오히려 더 들이대니까 슈퍼 마조같다고 해야 되나... 어, 어쨌든 재수 없잖아"


"그걸 동의하라고"


"그게 대체 오늘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 뭐야? 이번에는 무슨 꿍꿍이야? 대답해!"


"..."


평소의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집착남. 나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다. 온갖 수를 써서 접근했으니까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겠지.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더 싫어하게 되면 내가 좀 죽는다. 전혀 조금이 아니잖아... 그럼 어떡하지.


"어... 그, 아이카"


"뭐, 뭔데"


그러면... 그렇다면 말을 해버리는 게 아니라, 결과로 증명하면 된다. 내 오늘의 이상한 자각과, 결심을 한 아이카와의 관계성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좋아해. 사귀어 줘"



이제, 변해버릴 관계 같은 건 전혀 무섭지 않다.




https://ncode.syosetu.com/n2166fe/3/

반응형